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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태 숲 해설가의 나무 이야기 -회양목

유미란 기자 입력 2026.09.28 15:20 수정 2026.09.28 15:20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 단단하게 살아라.

↑↑ (회양목은 열매가 숙성되면 부엉이 모습이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 동부중앙신문

“선생님, 저기 부엉이가 있어요.” 회양목 앞에서 걸음을 멈춘 한 아이의 말이었다.  나는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작은 잎 사이에 익어 벌어진 회양목 열매가 보였다. 세 갈래로 갈라진 열매 틈으로 검고 윤기 나는 씨앗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작은 부엉이 모습이다. 누군가는 무심코 지나치고 또 누군가는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다. 숲과 마주하다 보면 이런 순간을 만날 때가 가장 즐겁다. 식물의 이름 하나를 더 외우는 것보다 평범하게 지나치던 나무에서 뜻밖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경험은 오랜 기억으로 남는다.


↑↑ (여주 효종대왕릉 재실에 자라는 회양목 350여 살로 추정되는 천연기념물 459호)
ⓒ 동부중앙신문

회양목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나무다. 공원과 정원의 낮은 울타리, 길가의 경계목으로 심겨 있어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작은 잎은 두껍고 단단하다. 가지는 촘촘하며, 나무 전체가 다부진 인상을 준다. 회양목은 사계절 푸른 잎으로 자라는 관목으로 석회암 지대에서 자생한다. 학명: Buxus sinica var. insularis (Nakai) M.Cheng 영문명: Korean boxwood로 한국이 자생지임을 알리고 있다.



회양목이라는 이름은 북한 강원도 회양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나무라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도장나무라는 명칭은 회양목의 줄기가 단단하여 도장을 만드는 데 요긴하게 사용되어 붙여진 쓰임새에 따른 이름이다.
“천천히 살아도 괜찮다. 단단하게 살아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너보다 더 먼 시간을 살아갈 씨앗 하나를 남겨라.”
회양목의 매력은 크기가 아니라 단단함과 끈기에 있다. 빠르게 자라 하늘을 향하는 나무도 있지만 회양목은 서두르지 않는다. 작은 잎을 달고 계절을 견디며 자기 몸을 천천히 만들어 간다. 가지와 잎이 촘촘하고 전정에도 잘 견딘다. 오랫동안 정원의 울타리와 경계를 지키는 나무로 사랑받아 왔다.



나는 회양목을 볼 때마다 사람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는 빨리 자라야 한다고 배웠다. 남보다 빨리 배우고, 더 높이 올라가야 하고, 더 멀리 가야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양목의 시간은 다르다. 천천히 자라는 것이 뒤처지는 것은 아니다.
한 해 조금 자라고, 또 한 해를 견디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속을 단단하게 채운다. 회양목은 그것이 또 하나의 성장임을 보여준다. 더 놀라운 것은, 꽃보다 그다음에 찾아오는 장면이다. 



↑↑ (3월 말이면 회양목이 꽃을 피운다.)
ⓒ 동부중앙신문

회양목의 꽃은 화려하지 않다. 봄철 잎겨드랑이나 가지 끝에 작은 꽃들이 모여 피기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대체로 3~4월에 개화한다. 꽃은 수수하지만, 그윽한 향기로 벌과 같은 곤충을 불러들인다. 그리고 꽃이 지나간 자리에 열매가 맺힌다.


↑↑ (익어가는 회양목 열매)
ⓒ 동부중앙신문

회양목의 열매는 작은 튀는열매다. 익으면 윗부분이 갈라지고, 그 안에 검고 윤기 나는 씨앗이 들어 있다. 식물학적으로는 아주 평범한 번식 과정이다. 그러나 자연을 오래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는 그 평범한 구조가 하나의 얼굴로 보인다.
두 개의 검은 씨앗이 눈처럼 보이고, 갈라진 열매의 모양이 얼굴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그곳에서 부엉이를 만난다.


부엉이는 밤의 새다. 소리 없이 주변을 살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눈을 뜨고 있는 통찰력과 지혜를 상징하는 존재다. 회양목과 부엉이는 어쩌면 닮았다. 회양목은 말없이 기다린다. 봄을 기다리고, 여름을 견디고, 가을에 열매를 익힌다. 그리고 계절이 깊어지면 작은 열매를 열어 다음 생명을 세상에 내놓는다.
꽃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씨앗은 미래를 보여준다. 이것이 내가 회양목의 열매 앞에서 오래 머무는 이유다.
우리는 흔히 꽃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꽃이 피면 사진을 찍고, 꽃이 지면 아쉬워한다. 그러나 나무의 입장에서 꽃은 끝이 아니다. 꽃은 시작일 뿐이다. 꽃이 진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열매 속에서 씨앗이 자란다. 그리고 그 씨앗은 지금의 나무보다 더 먼 시간을 향한다. 사람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 젊을 때는 누구나 꽃을 피우고 싶어 한다. 이름을 알리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더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묻게 된다.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보다 “나는 무엇을 남겼는가?” 얼마나 많은 박수를 받았는가보다 누군가에게 어떤 씨앗을 남겼는가. 회양목은 야무진 속을 채우며 말없이 그 답을 보여준다.


젊은 날의 화려함보다 오래 살아낸 사람의 마음이 아름답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보다 다음 세대를 위해 무언가를 남긴 사람이 아름답다.
가을 정원에 서면 화려했던 꽃들이 하나둘 사라진다. 여름의 풍성함도 서서히 물러난다. 그때 회양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작은 잎을 달고, 단단한 가지를 붙잡은 채 옹골찬 내면을 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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